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안녕 소크라테스]_2. 화가

안녕 소크라테스.

by Hi.Scarlett_for Griet 2020. 10. 10. 22:34

본문

728x90
반응형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이 문장을 마주한 나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이 사람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몇 번 본 적이 있다. 시선이 마주치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첫인상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판단해볼 때 좋은 사람인 것 같다.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항상 '어떻게?'가 문제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먼저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쉬웠다면 애초에 고민 같은 것도 안 했을 것이다. 그쪽에서 먼저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큰일인데..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잖아..' 머릿속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쌓여서 고민의 형태를 선명하게 드러낼 때쯤이면.. 이미 게임오버.
결국, 같이 있으면 어색함을 지울 수 없다. 분위기가 딱딱해짐을 느끼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그 사람도 그럴 것이다. 부드럽게 만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공통의 관심사라거나 알고 보니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 우연 혹은 우리 둘 모두와 친분이 있는 지인의 존재 등과 같은 이 필요한 것이다.


우린 참 많이 닮은 것 같아.
나는 그림을 보면 잔잔함을 느낀다. 감정선이 한없이 요동칠 때마다 보는 그림이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Johannes Vermeer -Girl with a Pearl Earring

 

 

그냥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면 동치던 감정이 잔잔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따뜻한 커피를 조심히 마시고 천천히 숨을 뱉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그림은 내게 너무 익숙한 친구고 나름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린 친구잖아. 친구는 서로 닮은 다잖아'

질문을 떠올리다가 질문과 그림 사이에 동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림의 유사성이 나와 문장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줄 것이다.
질문과 그림 사이의 유사성은 질문하는 과정그림 그리는 과정의 비교에서 발견된다. 질문과 그림은 모두 인상에서 시작된다. 이때, 인상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을 의미한다.
대상은 구체적인 대상일 수도 있고 추상적인 대상일 수도 있다. 대상화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포함된다. 내가 받은 인상에 주목하여 그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이 물음의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 질문이고,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선이나 색의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 그림이다.
욕망의 내용과 그것을 드러내는 형식은 '차이성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 내가 받은 인상에 대해 ~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는 것과 그것을 드러내고자 함은 '동일성의 영역'에 속한다. 나는 차이성의 영역보다는 유사성의 영역에 주목하여 이 곳에서 ‘나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이 문장을 마주하겠다. 동일성의 영역에서는 질문과 그림이 동일하기에 이 문장에서 질문의 자리에 그림을 대입해도 문장은 성립한다. 대입 후 문장은 자연스럽게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로 바뀐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물음들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다. 대답이 언젠가 주어지게 될 경우, 그 대답은 사태 실상에 대한 진술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존립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사유의 사태로

 

 

물음들은 대답에 이르는 길들이라니.

물음.. 그래 질문한 번 던져볼까? 이런 생각으로 나온 문장이 바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이다. 그리고 이걸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로 바꿔버렸다. 나에게 있어 이 둘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책 쓰기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는데, 첫날에 자기소개와 함께 앞으로 쓰게 될 글에 대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글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내가 글을 쓰는 최종 목적은 그림을 그리는 거라고. 그런데 기존에 나와있는 들을 뜻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조지프 코수스-인념으로서의 이념으로서의 미술, 존 발데사리-연필이야기

 

 

그리고 단순히 묘사들로 가득한 글도 아니라고. 너무 추상적이고 애매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다고.
실제로 나온 글은 전혀 딴 판이었다. 그런데 스스로도 잘 모르는데 당연한 결과다. 그 후로 항상 생각이 난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어떻게' 보다는 '어떤'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어떻게는 대략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든 결국에는 글을 쓰는 것일 테니까.
물음이 대답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니까 오늘도 물음을 던져본다.
'나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대답이 언젠가 주어지게 될 경우를 가정하자.

'언젠가는 되지 않을까요?'


그 대답은 사태 실상에 대한 진술 속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존립할 것이다.

그 대답은 실제로 일이 되어가는 형편이나 상황에 대하여 자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근데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는커녕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근데 어.. 기존에 나와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남는 건 추상적인 느낌밖에 없는데 이를 설명할 재주는 없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사유의 어떤 변화 속에 있다고 하는데.. 기대할 건 사유의 변화밖에 없다.
믿을 건 너밖에 없구나.. 평소에 생각이 너무 많아 성가시다고 한 거 정말 미안.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 그 속에서 생겨나는 각각의 변화와 서로서로의 변화. 수많은 변화들 사이에 대답이 있다.

 




지금 이렇게 글을 끄적이는 것도 변화들 중 하나라 믿으며,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귀퉁이라도 좋으니, 오늘의 끄적임이 한 번의 붓질이 되길 바란다.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