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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소크라테스]_prologue.

안녕 소크라테스.

by Hi.Scarlett_for Griet 2020. 11. 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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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Heidegger /1889. 9. 26.~1976. 5. 26.

 

 

1.

존재는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면서 은닉하는 가운데 도래한다.

자신을 밝히면서 은닉하는 도래야말로 존재가 인간에게 건네주는 무언()의 언어가 된다.

이러한 한에서 존재는 인간에게 언어로서 현성한다. 존재는 언어로의 도상에 있다.

비유하여 말하자면, 언어는 존재의 진리가 은닉된 채 머물러 있는 존재의 집이 된다.

그런데 존재의 밝음에로 탈존하는 한에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라면, 인간은 존재의 집을 파수하는 가운데 존재의 진리를 숙고함으로써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와야 한다.

즉 존재가 인간에게 언어로서 현성한다면, 인간은 존재를 언어로 가져온다.

 

2.

즉 존재의 진리가 자신을 은닉한 채 인간에게 언어로서 현성한다면, 인간은 은닉된 채 도래하는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온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자의 언어는 존재의 언어이고 후자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로되,

이 둘이 모두 존재의 진리를 간직한 언어인 한에서, 이 둘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본질을 발견한다.

언어의 본질은 존재 자체의 현성하는 본질을 간직함이다. 존재의 진리를 간직함으로써 언어의 본질은 구현된다. 그런데 존재는 인간에게 언어로서 현성하되 역사적 운명을 지녔기에 언어는 역사적인 것이요,

따라서 존재는 회상 안에 보존된다.

 

3.

즉 사유는 자신의 말함 속에서 단지 존재의 무언(無言)의 낱말만을 언어로 가져온다.
// 여기에서 사용된 >언어로 가져온다<라는 표현은 이제는 그야말로 낱말 그대로 취해져야 한다. 존재는 자신을 밝히면서 언어로 다가온다.
존재는 항상 언어로의 도상에 있다.
이렇게 도래하는 것을 탈-존적 사유는 그 자신 자신의 말함 속에서 언어로 가져온다.그리하여 언어는 스스로 존재의 밝음 안으로 고양된다. 이제야 비로소 언어는 저 비밀에 가득차고 우리를 항상 철저히 지배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있다. 그로써 완전히 본질에 이르게 된 언어는 역사적인 것이기에, 존재는 회상 안에 보존된다. 탈-존은 존재의 집을 사유하면서 거기에 거주한다. 이 모든 것에서는, 마치 사유하는 말함을 통해서는 정녕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그렇지만 사유의 이 눈에 띄지 않는 행동을 증거하는 하나의 예가 방금 우리에게 제시되었다. 즉 우리는 >언어로 가져온다<라는 이 '언어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어법'을 고유하게 — 다시 말해 더 이상이 아니라 단지 이것만을 — 사유함으로써, 또한 이처럼 사유된 것을 '앞으로도 항상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서 주의 깊은 말함 속에 간직함으로써, 우리는 존재 자체의 현성하는 본질을 언어로 가져왔던 것이다.

(361-362)[네이버 지식백과] 존재 자체의 현성하는 본질을 언어로 가져옴 (하이데거 『이정표』 (해제), 2005., 이선일)


이 글의 첫인상은 '뜬다'이다.
글이 뜬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 뜬다.
그 사이에 낀 조사까지 뜨는 것 같다.
글 대신 마음이 들뜨면 좋으련만,

분명 한국말로 적힌 글을 읽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읽다 멈추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를 반복.

작년 봄날에 한참이나 노려보았다.
그러다 힘을 빼고 멍하니 쳐다보기도
난해합니다. 정말,
지금은 그냥 낯설지 않을 뿐.
이해는 멀지만,
그냥 성큼 다가가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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