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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소크라테스]_정체성

안녕 소크라테스.

by Hi.Scarlett_for Griet 2020. 11. 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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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Paul Gauguin / Where do we come from? Who are we? Where are we going?

 


고갱의 이 그림은 1987년에 타히티에서 그려졌다. 1987년은 고갱이 건강악화와 빈곤, 딸의 죽음 등으로 자살시도까지 하는 극한의 상황에 몰린 해이다. 이때에 그려진 그림이기에 어찌보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극한의 상황에 놓인 나는 대체 무엇이냐고?'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오른쪽 부분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응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탄생'이다. 가운데 부분은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응하고 '삶'을 의미한다. 마지막 왼쪽 부분은 '우리는 어디로 갈것인가?'에 대응하고 '죽음'을 의미한다.
이 그림은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담고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가운데다. '우리는 누구인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이미 지난 과거도 아니요, 다가올 미래도 아닌 현재다. 인간은 현재 살아가는 '삶'속에서 물음을 던진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인간이 풀어야할 매듭이 있다면 바로 정체성일 것이다. 그 매듭을 푸는 방법은 여럿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언어'가 아닐까 싶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 이정표(해제) 333」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대상을 '존재'로 두고 존재에 관한 철학을 한 사람이다. 그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난해의 끝을 보여주는 책을 썼는데.. 그의 생각과 그의 말, 그리고 이것이 오롯이 담겨있는 책.
난해하다. 그래도 당신이 쓴 책을 보면 반가움이 있습니다. 하이데거 씨!


평소에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하시나요? 이런 질문을 받는 순간 처음으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존재라는 단어는 낯설다. 우리는 자신과 존재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존재’ 와 ‘너의 존재’는 다르다.
존재’와 ‘’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너’가 다르듯이 ‘나의 존재’와 ‘너의 존재’도 다르다. 우리는 존재에 낯설고 주로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하이데거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존재는 인간에게 언어로서 현성한다. 언어는 존재가 인간과 현성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 이정표(해제)」

1.
여기서 하이데거는 인간과 존재를 구분한다. 하이데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와 인간을 동일시 하는 경향에서 살짝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나라는 존재’에서 ‘나’ 와 ‘존재’를 구분해서 생각해보자. 존재는 인간에게 언어로서 현성한다, 즉 관계한다. 언어는 존재가 인간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존재는 언어를 통해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존재가 인간과 관계 맺는 과정을 살펴보자.

 2.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가 자신을 밝히면서 은닉하는 도래의 사건’이라고 정의했고 ‘언어는 존재의 집’ 이라 비유했다. 존재가 머무는 집에는 은닉된 것이 있다. 하이데거는 그것을 ‘존재의 진리’라 한다. 존재는 자신의 진리가 숨겨져 있는 집에서 산다. 한편 인간은 자신의 충동안에 갇혀 있었다. 이점에서 보면 동물, 식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충동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의 충동에서 벗어나는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의 밝음에로 탈존’이라 표현했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자신의 충동’에서 ‘존재의 밝음’으로 본질적 거처를 옮겨야 한다.
즉, 충동이라는 집에서 존재의 집으로 이사가야 한다.

3.
존재는 자신의 집에 인간을 받아들인다. 대신 인간에게 은닉된 존재의 진리를 말하도록 요청한다. 인간은 ‘내 집에 살게 해줄테니 대신에 숨겨진 진리 좀 가져다줘’라는 존재의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한 지붕아래 존재와 살게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과정을 ‘존재의 진리가 자신을 은닉한 채 인간에게 언어로서 현성한다면, 인간은 은닉된 채 도래하는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온다.’로 표현한다.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와야 한다.이로써 인간의 사명은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오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한 내용을 요약해 보자.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인간은 언어로 본질적 거처를 옮겨야 한다. 존재는 자신의 집인 언어에 인간을 받아들인다. 대신에, 인간에게 은닉된 존재의 진리를 말하도록 요청한다. 인간은 본질적 거처를 옮기기 위해서 존재의 요청을 받아 들인다. 인간은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온다. 이로써 인간의 사명은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오는 것이 된다.’

진정한 인간이라는 건 자신의 정체성에 도달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정체성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존재의 진리를 언어로 가져오는 행위가 될 텐데, 언어로 가져오는 행위는 자신의 언어로 하는 모든 행위가 될 것이다. 가령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 철학자가 철학을 하는 행위 등이 있다. 혹은 이렇게 티스토리를 하는 행위도 그에 포함될 것이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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